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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그 곳을 거닐다

[창덕궁 / 후원] 관람지일원 # 관람지 # 펌우사 # 존덕정 # 승재정 # 의두합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설날 2017

 

 

창덕궁은 경복궁과 다르게 왕이 쉴 수 있는 정원 영역을 많이 만들었다.

창덕궁의 후원은 궁 전체의 면적에서 60%이상을 차지한단다.

 

그래서 일까??

조선 전기의 왕 가운데 세종을 빼고는 모두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부용지와 애련지를 지나~

관람지일원에 왔다.

 

 

이 곳은~ 특히나 꽃피는 봄이 오면,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봄이 오면 가장 먼져 생각하는 곳이기도 하다.

 

창덕궁에 관해 자료를 검색하다가 마음에 드는 글이 있어서 옮겨본다.

 

출처는,,,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2&contents_id=4657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에 위치하는 궁이기 때문에 이궁() 혹은 별궁이라고 불렀습니다.

혹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경복궁은 정도전을 위시한 신하들이 설계했다면,

창덕궁은 왕(태종)의 의도에 따라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복궁은 임금이 효율적으로 일하기에만 편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왕의 처소인 강녕전 바로 앞에 국무회의실인 사정전이 있고 그 앞에는 근정전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하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살기에는 아주 답답한 구조입니다. 마음 놓고 쉴 데가 없습니다.

흡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좁은 지역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왕 가운데 세종을 빼고는 모두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반면 창덕궁은 왕의 근무 공간인 외전(인정전이나 선정전 등이 있는 지역)을 왼쪽 밑으로 몰아놓고 왕이 쉴 수 있는 정원 영역(후원)을 아주 넓게 만들었습니다.

창덕궁은 태종이 1405년부터 건축을 시작했는데 1412년에 정문인 돈화문을 지으면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장 강한 왕이었던 세조는 후원을 2배도 넘게 확장합니다.

역시 강한 군주답게 자신이 쉬는 공간을 크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다 임란 때 다 탄 뒤 선조가 1607년에 다시 짓기 시작합니다.

건설이 끝난 1610년부터 창덕궁은 정궁이 됩니다.

원래는 경복궁을 복원했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왕자의 난 등의 이유를 들어 불길하다고 창덕궁을 먼저 복원합니다.

이렇게 복원된 창덕궁은 인조반정(1623) 때 또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됩니다마는 20여 년 뒤에 또 복원됩니다.

그 뒤로 창덕궁은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관람지,,,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 중 하나로,

연못가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합죽선() 모양의 정자인 관람정이 있다.

한반도처럼 생겼다 하여 반도지()라 불렸다가 관람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왼쪽 부터,,, 승재정, 펌우사, 존덕정, 관람정

 

승재정은 언제 건립 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자세한 내용도 알 수가 없다 ㅡㅡ;;

 

 

 

관람정과 승재정,,,

 

펌우사,,, 왕세자가 독서하며 심신을 수련하던 곳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 서쪽에 있다. ‘폄우()’란 ‘어리석음을 고친다’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1827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고, 정조 때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궐도>에는 ‘ㄱ’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자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온돌방 2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된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이며 마루 쪽은 정면과 측면을 개방하여 평난간을 둘렀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댄 초익공 형식의 집이다.

 

 

 

 

 

펌우사 앞에서 해설사 아저씨께 배운데로~

배를 조금 내밀고, 손은 뒤로 잡고, 위엄 있는 발걸음으로 걸어본다.

 

존덕정은 존덕지()에 만들어진 정자이며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이다.

 

 

조선시대 인조() 재위 22년인 1644년에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는 육모정이라고 불렀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어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구성되고 보개 천정과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황룡과 청룡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 현판이 걸려있다.

 

 

 

 

 

가을을 가두어 놓은 듯한,,, 후원의 겨울 :)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

 

 

 

아,,, 정조.

벌써 2년 전이구나.

 

영화관에서 영화 "사도"를 보면서

영조와 사도, 그리고 정조까지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는 듯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보았었는데,

 

몇 일 전, 또 다시 영화를 보면서 슬퍼했던,,,

 

 

 

겨울이라 옥류천 일원의 관람은 제한됐다.

그래서 마지막 코스인,,, "연경당 일원"으로 가는 길.

 

효명 세자가 서재로 사용했던 의두합,,,

 

 

 

기오헌은 정면 4칸 측면 3칸, 운경거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작은 크기인데,

운경거는 기오헌에 딸린 집이다.

두 집은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꾸밈새도 궁궐 안의 건물치고는 초라하달 만큼 수수하여 오히려 어떤 내력을 간직한 듯하다.

 



기오헌은 효명세자가 순조 27년(1827)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옛 독서처 자리에 고쳐 지은 건물이다.

당시는 의두합()이라고 했는데아마도 집의 좌향이 북향인 점을 고려해서 지은 듯하다.

고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비고』(輿)에서는 의두합을 “북두성[]에 의지해서[] 경화()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동궐도〉에는 이 집이 ‘이안재’()로 표기돼 있다.

짐작컨대 이안재는 고쳐 지은 의두합 자리에 있던 옛 독서처의 이름인데 〈동궐도〉를 그리면서 화원이 그만 실수로 옛 이름을 그대로 써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기오헌’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 확실치 않으나

’과 ‘’ 모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남쪽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니 무릎 하나 간신히 들여놓을 작은 집이지만

참으로 편안하구나”( )에서 따온 것이니 전혀 엉뚱한 변화는 아닌 듯하다.

 

아무튼 「의두합상량문」에는 이곳을 수만 권의 책을 쌓아두고 독서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옆 건물 운경거는 그 이름이 ‘시와 음악이 있는 집’임을 암시하고 있으니,

의두합과 운경거는 익종이 대리청정을 하는 틈틈이 독서하고 시와 음악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창덕궁 / 후원] 관람지일원 # 관람지 # 펌우사 # 존덕정 # 승재정 # 의두합 # 설날  2017.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