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 구석구석

[전주 / 전주사고]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 + 전주경기전 2014

 

 

 

작년 가을,,, 내마음을 설레게 했던

 

전주사고의 단풍 진 풍경은 내 머릿 속에는 예쁜 그림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전주사고,,,

 

 

 

 

전라북도 전주시 소재 경기전(慶基殿)의 내부에 설치되었던 사고.

 

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이미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용(御容)이 경기전에 봉안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실록각(實錄閣)이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아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부(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하였다.

당시 세조는 전라도에 명해 실록각을 건립하도록 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미루었다.

 

 

1472년(성종 3) 봄, 세조·예종 양조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 때 춘추관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지경(金之慶)이 이곳 관찰사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실록각을 건립하고자,

 

양성지와 더불어 경기전의 동편에 자리를 잡고 계(啓)를 올렸다.

 

 

이에 이웃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役軍)으로,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공역(工役) 책임자로,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은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여 1473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실록각이 완성되자 그해 6월 진남루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뒤 120년간 실록과 기타 서적이 잘 보관되어 내려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보현사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임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봉안하기 위한 5사고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봄,,, 단풍잎에 조그만한 새싹이 돗아났다.

 

귀엽고 앙증스럽다. ^ㅡ^;;

 

 

 

 

전주사고를 지킨 "손홍록" 이야기,,,

 

 

 

 

조선의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지킨 전주 지방민들의 활약상을 다룬 이야기.


 


사고(史庫)란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률 등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놓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이다.

 

처음에는 서울 춘추관과 충주의 사고에 소장하였는데,

 

1445년(세종 27)에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설치하여 모두 네 곳에 실록을 보관함으로써 손실의 위험에 대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왜군은 전주를 공격 목표로 삼아 금산까지 진입해왔다.

 

이 때 경기전(慶基殿) 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영정과 사고의 실록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보관할 궁리를 하였다.

 

그러나 13대 임금의 실록 총 805권 614책 및 기타 전적 등을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서는 말 20여 필과 많은 인부들이 필요하였다.

 



오희길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기에 뜻을 같이 할 사람을 찾던 중 그 근처에 명망이 나있던 선비 손홍록을 찾아가서 의논하였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 하기에는 역부족이오니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손홍록은 오희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의 나이 56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뜻을 같이하여 돕기로 하였다.

 

그래서 학문을 같이 했던 고향 친구인 안의와 조카 손숭경, 하인 30여 명과 함께 전주로 달려갔다.

 

6월 초부터 짐을 꾸려 6월 22일에는 어용(御容)과 실록을 정읍군 내장산의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하루 뒤에 산중 깊숙이 들어가 용굴암으로 피난시켰다.

 

그 후 어용만 따로 비례암으로 옮겨 모셨다.

 


용굴암은 내장산의 최고봉인 신성봉 아래 절벽에 뚫려 있는 암굴 옆의 암자로 천혜의 은신처이기 때문에,

 

사고의 실록과 전적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다.

 

다음해 전라관찰사로 부임한 이정암은 실록과 태조 영정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손홍록 등의 노고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당시 서울·충주·성주의 사고는 모두 전쟁 중에 소실되었으나

 

전주 사고에 보관되었던 역대 실록과 『고려사』등의 전적만이 무사히 보존되어 남아 있게 되었다.

 

모두 소실될 뻔한 명종 이전의 역사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게 된 사연으로, 손홍록과 오희길 등 지방 선비들의 충절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단종,,, 이름만 듣고 보아도 마음이 아픈,,,ㅠ,.ㅠ

 

 

 

 

 

 

 

 

 

 

 

 

 

 

 

 

 

 

 

 

 

 

 

 

전주에 일찍 도착했기에,,,

 

함참을 돌아다녀도 시간이 제자리 걸음인 것 같다.

 

 

 

덕분에 여유롭게 어슬렁,,, 어슬렁,,,

 

전주 곳곳을 누빈다.

 

 

 

 

 

[전주] 전주사고 - 전주경기전  2014.04.10 (첫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