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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

진도, 운림산방 - Canon 400D 2012

진도 그림의 뿌리이자 한국 남화의 고향이 바로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남화의 맥을 잇는다.

허련은 진도 태생으로 이웃 땅인 "해남 녹우당"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는데,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스승인 김정희가 죽은 후 허련은 고향으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펼치며 한국 남화의 맥을 형성한다.

남화 또는 남종화라고 불리는 화풍은 전문 화원들이 그리던 북종화와는 대비되는 그림으로 수묵을 가지고 담대하면서도

자유로운 형식으로 선비의 마음을 담아 그리는 산수화를 말한다.



종종 영화나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해 눈에 익은 연못이 보이고

뒤로 허련이 살았던 운림산방이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에서는 허련의 작품을 비롯해 그의 손자인 허건의 작품까지

남화를 대표하고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관과 함께 있는 진도역사관에서는 진도의 옛 모습에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운림산방에서는 남도예술은행이 개최하는 토요경매가 열린다.

남도예술은행이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해서 매입하고 그것을 경매에 내어 놓는데

한국화, 문인화, 서예 등이 대부분이다.

꼭 경매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좋은 볼거리가 되니 시간을 맞추어 찾아보면 좋을 듯,,,


소치허련,,,

  

본관 양천().

자 마힐(), 호 소치()·노치().

1808년 2월 7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허각()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름은 허련()이었으나 후에 허유() 로 개명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을 두고 허유였다가 허련으로 변경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허씨대종보에는 련()으로 기록하고 있다.

1839년 32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화를 추사 김정희()에게 보였다가

작품의 솜씨에 감복한 추사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갔다.

허유는 한양에 머물면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되어 사사를 받았다.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되자 해남까지 배웅하였고

이듬해 제주도로 건너가 서화수업을 받았다.

1843년 제주 목사 이용현()의 도움으로 추사의 적거지를 왕래하며 서화를 익혔다.

1846년 한양으로 돌아와 헌종에게 《설경산수도》를 바쳤고 극찬을 받았다.

1847년 세번째 제주도를 방문하여 스승 추사를 찾아뵈었다.

1856년 추사가 타계하자 고향 진도로 낙향하여 운린산방()을 짓고 정주하였다.

1866년 상경하였고 1877년 70세에 흥선대원군을 만났으며

대원군은 그를 두고 "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887년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893년 9월 6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글·그림·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 《추강만교도()》

《만산묘옥도()》 《산교청망도()》 《동파입리도()》 《산수병풍()》 《산수도

 《노송도병풍()》 《묵해도()》 《괴석도쌍폭()》

포도도()》 등이 있다.

 








운림산방,,, 지도에서 [15번]

 

진도, 운림산방 Canon 400D 2012.04,15 (둘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