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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전시회,영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이중섭, 백년의 신화] 덕수궁미술관 # 이중섭 # 백년의 신화 2016

 

 

덕수궁 안 쪽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 덕수궁관 (덕수궁미술관)"에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시중인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보러왔다.

 

 

 

 

 

 

이번 전시회는 덕수궁미술관에서 2016년 10월 3일까지이며,

 

화, 목, 금, 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수,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이고,

 

어른 입장료는 7000원이다.

 

 

 

 

 

 

일단은 요즘 꽤나 비싸진 미술관, 전시관 입장료를 생각하면

 

입장료 가격도 착하고,

 

덕수궁과 더불어 만나 볼 수 있는 전시회라 더 눈길이 갔다.

 

 

 

 

 

 

 

 

 

 

 

덕수궁미술관도 참 오랜만이다.

 

 

 

 

그 동안, 내 마음에 드는 전시회가 없던 것인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

 

 

 

 

실내촬영은 금지였다.

 

인터넷 신문을 보니, 첫 번째날만 사진 촬영이 허가 됐었다는 기사가 있더라,,,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은,,,

 

갤러리 4곳으로 나뉘어 전시를 하고 있었다.

 

 

 

 

전시회 내용은 나의 생각과 팜플렛의 내용을 참고하여 정리해보도록 한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양, 정주, 도쿄에서 학업을 쌓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화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온 후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으로 제주도, 부산 등에서 피란생활을 했고,

 

전쟁 직후에는 통영, 서울, 대구등을 전전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6년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첫 번째 갤리리에서는~

 

<1916년~1950년 평원, 평양, 정주, 도쿄, 원산>

 

 

 

 

이중섭은 1916년 9월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1930년 정주의 민족사관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예일대학교 출신의 미술교사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7년 ~ 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을 했는데,

 

문화학교는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랍학교였다.

 

문화학원의 선배들도 적극 참여했던 "자유미술가협회"에서 작품 발표를 시작해서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협회의 회원 자격을 얻기도 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가족들이 있던 원산으로 귀국하였으며,

 

1945년 5월 해방 직전 문화학원의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식민지, 전쟁, 분단등의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중섭.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다고 하니,

 

그의 처절했던 예술가의 삶이 조금은 느껴지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내에게 보낸 여러장의 엽서다.

 

 

한쪽면엔 그림, 다른 한쪽면엔 주소,,,

 

 

 

 

 

 

두 번째 갤러리에서는~

 

<1950년~1953년 서귀포, 부산>

 

 

 

 

1950년 12월 원산 폭격을 피해 어머니는 남겨둔 채,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온다.

 

이 때 그 이전까지 제작한 작품을 모두 어머니 품에 남겨 놓고 오는 바람에

 

이중섭의 1950년 이전의 작품은 극히 드물다.

 

피란지 부산이 너무 좁았던 관계로 1951년 제주도로 거쳐를 옮겼는데

 

여기서 약 1년간 가족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피란생활을 한다.

 

 

 

이 때의 작품들엔 바닷가에서 게와 함께 뛰노는 아이들이 많이 등장한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작품은 "은지화"다.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라고 설명엔 씌여 있지만,

 

가난하고 열악한 생활 속에서 그림 그릴 곳을 찾다 발견한 것이 아닐런지,,, 생각해본다.

 

 

은지화는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되는 그림이다.

 

 

 

이중섭이 300점 정도의 은지화를 제작했다는 증언도 있다고 한다.

 

 

 

이중섭의 그림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솔직하고, 맑고 순수한 모습이라 그림을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들, 새, 게, 나비, 꽃, 닭,,,그리고 가족, 소,,,

 

 

 

 

 

 

 

세 번째 갤러리에서는,,,

 

<1953년 ~1954년 통영>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1954년 6월경까지 월남한 공예가 유강열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우화작품이나

 

유명한 "소" 연작들이 이 때 작품이다.

 

 

 

 

그리고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이중섭의 편지화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중섭은 한국정쟁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졌다.

 

 

 

왜 함께 일본으로 가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가족이라면 죽더라도 함께 죽고, 살더라도 함께 살아야 하는 것 아닌지,,,

 

 

이 후, 이중섭은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

 

 

 

 

전시되어 있는 편지내용도 사랑스러울 뿐더러,,,

 

그림은 어찌나 귀여운지~

 

하나하나 눈 여겨 읽어보지 않을 수 없어서 꼼꼼하게 읽었다.

 

 

 

아이들과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편지 내용보다 200%, 300% 느껴지는 편지였다.

 

 

 

하지만, 처음엔 사람스럽고, 즐거운 내용의 편지라면,

 

뒤로 갈 수록 자신없고, 우울해지는 편지들이 많아 마음이 아팠다.

 

 

 

1년 전의 편지에 아빠가 이번엔 꼭 자전거 사줄께요,,,

 

1년 후의 편지에도 아직도 자전거를 사주지 못해서,,, ㅠ,.ㅠ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람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 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고,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중섭이 보낸 편지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약 60통, 160매에 이른다.

 

 

 

편지에서보면, 당장이라도 만나야 할 것 같고,

 

아내분이 한국으로 달려 왔어야 할 것 같은데,,,

 

뭔가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만,

 

왜 만나지 않았고, 왜 함께 일본으로 가지 않은 것이지~ 이해 할 수거 없다.

 

 

나중엔 아내분에게 화가 나더라는,,,

 

 

 

 

 

 

 

<1954년~1955년 서울>

 

 

 

 

가족들과 떨어진 가운데 홀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누상동, 상수동등 지인의 집에서 기숙하며 1955년 1월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일본의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을 했으나

 

중간 업자가 돈을 떼먹는 바람에 극심한 빚에 시달린다.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개인전을 열고 작품도 20점이나 판매하였으나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진다.

 

 

 

 

 

 

 

네 번째 갤러리에서는,,,

 

<1955년 대구 / 1956년 서울 정를>

 

 

 

1955년 1월에 있었던 서울 전시에 이어

 

4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절친이던 시인 구상의 도움을 받아 전시회를 열지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의 역할도 못하면서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에 시달렸다.

 

 

 

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 소설가 박연희, 시인 조영암과 함께 생활했다.

 

 

이 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감" 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장염등으로 다시 병원 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 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부유한 집에서는 태어났으나,

 

그 이후 식민지, 전쟁, 분단, 가족과의 헤어짐, 사업의 실폐, 빚, 부도, 정신병, 거식증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이중섭.

 

 

그의 그림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팜플렛에 실려 있던 이중섭을 그림 두 점을 사진으로 찍었다.

 

 

"소" 그림으로 잘 알려진 민족의 화가 이중섭"

 

 

 

 

이 그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중섭의 그림이다.

 

천진함, 그리움, 순수함,,, 모든 것이 스며 있는 그림 같아,,,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기억남는 것이 있다면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다는 편지들이다.

 

세상의 모든 아빠들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짠~ 했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덕수궁미술관 너무 추웠다. ㅡㅡ;;

 

 

 

밖에 온도는 35도다,,, 36도다,,, 광화문일대는 40도가 넘는다,,,

 

그래서 더운 것보다는 괜찮다 생각했지만,

 

 

 

너무 추워서 작품 감상에 조금은 방해가 됐다. ^ㅡ^;;

 

 

 

 

 

 

 

 

이중섭 미술전은,,,

 

 

 

지인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다.

 

입장료도 괜찮고, 이중섭 단독 전시라 작품도 많고,

 

쉽게 접할 수 없던 편지까지 볼 수 있었기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이중섭, 백년의 신화] 덕수궁미술관 # 이중섭 # 백년의 신화  2016.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