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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그 곳을 거닐다

[창덕궁] 대조전 + 황후의 침대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12

비극의 역사가 담겨 있는 황후의 침전,,, 대조전


대조전,,,

 

창덕궁의 내전(內殿)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로,

이 건물에서는 조선 제9대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보물 제816호.

 

대조전은 창덕궁 창건 때인 1405년(태종 5)에 함께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496년(연산군 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창덕궁 재건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또 불에 타, 1647년(인조 25)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때는 인경궁(仁慶宮)의 경수전(慶壽殿)을 철거하여 이건하였다.

1833년(순조 33)에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다.

 

1917년에도 불에 타자,

1919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移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대조전은 수차례에 걸쳐 소실되고 재건되어,

본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현재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 북쪽에 위치하여 정면에 선평문을 두고 건물 동쪽에 흥복헌(興福軒),

서쪽에 융경헌(隆慶軒)이라는 익각(翼閣)을 달고 있으며,

함광문(含光門)·청향각(淸香閣) 등과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둘레에는 양심합(養心閤)·경훈각(景薰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뒤로는 여러 단의 화계가 장대하게 구성되어 있다.

19세기경에는 이곳에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인 징광루(澄光樓),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건물인 집상전(集祥殿)과 주변의 수많은 행각들이 있어

더욱 장려한 구성을 하였다.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36칸으로 줄어들었다.

현존 건물은 전면에 기둥 3칸 크기의 너비로 넓은 월대(月臺)를 쌓았다.

이 월대 뒤쪽에 장대석 기단을 쌓고 건물을 올렸는데

기둥은 외진주(外陣柱)는 방주(方柱), 내진주(內陣柱)는 원주(圓柱)를 세웠다.

 

평주상에는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형식의 2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간(柱間)에는 화반과 운공(雲工)을 배치하여 주심도리를 받게 하였다.

내부는 고주 위에 대량을 걸고 그 상부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실 및 작은방에는 천장 높이를 낮게 하여 종이반자를 하였다.

 

지붕에 용마루가 없으며,

내부에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갖추어 놓아

현대적인 실내장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조전 안 침전엔

마지막 황후 "순종효황후"가 사용했던 침대가 있다.



대한제국 시기 중국에서 들여온 침대로,

매트리스가 심하게 주져 않고 덮개의 부식이 심해

문화재청과 에이스침대가 함께 2009년에 복원을 완성했단다.

 



순정효황후와 순종황후,,,


순종효황후,,,

 

1894(고종 31)∼1966.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황후.

 

본관은 해평(海平).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이다.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당시의 자자한 소문에는 택영이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고 한다.

순종의 동생 영친왕(英親王)은 고종의 제7자로 황귀비엄씨(皇貴妃嚴氏)의 출생인데,

 

순종이 즉위하자 엄비와 이토(伊藤博文) 등의 중론에 따라 황태자로 책립하였는바

당시 세론은 형제로 계통(繼統)을 세움이 불가하다 하면서 황태제(皇太弟)라 하였다.

1907년에 여학(女學)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女侍講)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황비가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만년에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낙선재(樂善齋)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1966년 순정효황후 윤씨의 장례식 모습,,,

 

[창덕궁] 대조전 + 황후의 침대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12.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