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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

진도, 남도석성 / 남도진성 2012

사람이 살고 있는 옛 성이다.

진도는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고 한다.

남도석성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이 섬에 들어오면서 쌓았다고 전해지나

기록상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조선 세종 때 지금의 모습으로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서문으로 올라 성곽 위로 난 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데

성벽의 높이가 4m로 꽤 높으며 성의 둘레는 500m 정도이다.



지금도 성 안에는 마을이 남아 있어 위에서 바라보는 마을 풍경이 정겹다.

성을 한 바퀴 돌 때쯤 마을로 내려가는데

주민들이 사는 곳이라 실례되지 않게 그 안을 둘러보도록 하자.

성 안에서 옛날 집터를 찾을 수 있으며 관아가 복원되어 있다.

남문 앞 개울에는 두 개의 작은 홍교가 놓여 있다.

선암사의 승선교 등 유명한 홍교들과 그 모양이 닮았으나 자연 석재를 그대로 사용해 운치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곽.

사적 제127호. 둘레 54m, 지정면적 20,169㎡.

고려 원종 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진도군에는 백제시대에 이미 3개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도산현(徒山縣 : 지금의 嘉興)과

매구리현(買九里縣 : 지금의 臨准)으로,

매구리현의 중심이 구도포(九桃浦)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지방을 노략질하므로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이 그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남도석성의 본래 규모는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고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하며,

또한 1765년(영조 41)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43개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터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964년 6월 10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남도석성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남도석성 남서쪽의 망대산

서망산에서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부분이 빈집이었으나

간혹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보이는 집도 있다.


남도석성 / 남도진성,,, 지도에서 [9번]

 

진도, 남도석성 / 남도진성 2012.04.14 (첫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