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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그 곳을 거닐다

[경복궁] 명성왕후, 건청궁 2011

건청궁은 경복궁 안쪽 끝에 있어

궁궐 이 곳, 저 곳을 돌다보면 지쳐 항상 이 곳까지 오지 않게 됐었다.

 

경복궁은 워낙 넓다보니 구석구석 자세히 돌아보려면

반나절은 걸릴 듯 싶다는 나의 생각!!

 

향원정 너머로 보이는 "건청궁"을 바라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슬퍼했던 곳~

 

오랜만에 슬픈 역사가 있는 그 곳~

"건청궁"에 들어가 본다.

 

1873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내탕금(왕의 사비)"을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짓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고종은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였다.



"고종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는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다.

또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이라고도 불렀다.

 

1887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건청궁"은 이처럼 신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도모한 산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 의지가 외세에 의하여 꺾인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 안의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건청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다.

 


광복 후 건청궁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동쪽에 명성황후가 난을 당한 곳이라는 뜻의 "명성황후조난지지()"라는 표석과 함께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가 2007년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건물 배치는 크게 "장안당()·곤녕합·복수당()"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 등이 있다.

 


이 곳에 머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하고, 원망 되고, 슬프고, 화가난다.

2007년 복원 이전,

"터"만 남아 있을 때보다 마음이 더 무거운 건 왜일까...??






 

[경복궁] 명성왕후, 건청궁 2011.11.03